
사진 wordrow.kr
- 말이 많을수록 스스로 자신을 궁색하게 한다.
노자는 『도덕경』 제5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하게 되니, 차라리 중심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이 구절은 단순히 말을 아끼라는 처세훈이 아니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 말은 자신의 인격과 신뢰를 무너뜨리는 칼이 된다는 경고이다.
최근 유시민 작가의 잇따른 발언을 지켜보며 노자의 이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는 2021년 1월 22일 노무현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에서 자기의 과오를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비평의 한계를 벗어나 정치적 다툼의 당사자처럼 행동했습니다.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습니다.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습니다.
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와 불투명한 상황을 오직 한 방향으로만 해석해, 입증 가능성을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고 충분한 사실의 근거를 갖추지 못한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기본을 어긴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와도 책임을 나눌 수 없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이 부끄럽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립니다. 저의 잘못에 대한 모든 비판을 감수하겠습니다. 저는 지난해 4월 정치비평을 그만두었습니다. 정치 현안에 대한 비평은 앞으로도 일절 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과문은 단순한 사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자신의 언어가 ‘사실보다 감정’에, ‘논리보다 확증편향’에, ‘비평보다 정치적 편향’에 기울어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기록이다. 다시 말해, 한 지식인이 자신의 언어가 객관성을 잃었음을 고백한 공개적인 자기반성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유시민은 그때의 유시민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최근 그가 내놓은 여러 정치적 발언을 보면, 오히려 과거 사과문의 내용이 현재의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상대에 대한 강한 단정과 비판, 거친 표현과 과감한 예측은 지지층에게는 통쾌함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실과 논리를 차분히 따지는 공론장의 언어라기보다 정치적 수사의 언어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충분하다.
특히 한동훈 당시 검사장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며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의 기본을 어겼다”라고 깊이 사과했던 사람이, 오늘날에는 또 다른 정치인을 향해 강한 언어를 사용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일관성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물론 정치적 평가와 비판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언어 사용을 반성했던 사람이 다시 유사한 방식으로 논란을 낳는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평론가는 정치인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덕목은 비판의 공정성이다. 같은 행위는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고, 자신이 과거에 인정했던 잘못의 기준도 현재의 자신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은 설득력을 잃고, 신뢰는 조금씩 마모된다.
노자가 말한 ‘다언삭궁’은 바로 이런 상황을 경계한다. 말을 많이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이 없는 말’,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 말’, ‘절제를 잃은 말’이 결국 화자를 궁색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공자는 “군자는 말에 신중하고 행동에 민첩하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라고 했고, 『채근담』은 “입은 마음의 문이니 잘 지키지 않으면 재앙이 여기서 나온다”라고 경계했다. 서양에는 소크라테스에게 전해지는 말로 널리 알려진 말로, “말하기 전에 세 가지를 걸러내라. 그것은 ‘사실인가’, ‘선한가’, ‘필요한가?’” 이른바 ‘삼중 여과(Triple Filter Test)’이다.
또한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말보다 두 배 더 많이 들으라는 뜻”이라고 했다. 현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언어의 절제였다. 언어는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지배한다. 공적 언어를 다루는 사람일수록 그 말은 더욱 무거워야 한다. 말의 ‘양’이 아니라, 말의 ‘책임’이 그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권위는 화려한 수사에서 나오지 않는다. 끊임없는 자기 검증과 자기 성찰에서 나온다. 자신의 과거 발언을 돌아보고, 필요하면 수정하며, 같은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적 언어는 신뢰를 얻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그것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실수가 아니라 태도에 있다. 노자의 경구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 다언삭궁 불여수중’
말이 많을수록 자주 궁색해진다. 중심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오늘날 이 말은 정치인에게만 해당이 되는 교훈이 아니다. 평론가와 언론인, 지식인, 그리고 공적 영향력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던지는 경고이기도 하다. 자기 성찰이 결여가 된 언어는 결국 상대보다 먼저 자신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언어는 상대를 겨누는 화살이기 이전에,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품격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출신 검사였던 한동훈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토록 낮은 자세로 사과했던 사람이, 검정고시 출신 대통령에게는 거침없는 독설과 저주에 가까운 표현을 쏟아내는 것이 과연 일관된 태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중에서는 이를 두고 학력에 따른 태도 차이가 아니냐는 냉소적인 말까지 들린다. 나는 설마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가 누구이든 같은 기준과 같은 언어로 평가하는 것이 공적 지식인의 책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문제의 핵심은 상대의 학력이나 이력이 아니라 비판의 일관성과 자기 성찰이다. 과거 스스로 ‘정서적 적대감’과 ‘확증편향’을 반성했던 사람이 오늘의 자신의 언어에도 같은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지, 바로 그 점을 국민은 묻고 있는 것이다.
요즘 그의 발언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그는 평생 타인을 향한 비판과 논평으로 살아온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누구보다도 자기의 말과 생각을 먼저 돌아볼 때가 되었다. 진정한 지식인의 품격은 타인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의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는 데 있다. 자기 성찰 없는 비판은 결국 설득력을 잃고, 절제 없는 언어는 끝내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노자가 말한 ‘다언삭궁(多言數窮)’은 바로 이런 경우를 경계한 말일 것이다.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성찰 없는 말이 많을수록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궁색하게 만든다. 비판은 ‘타인’을 향할 때보다 ‘자신’을 향할 때 더 큰 힘을 갖는다. 이제 그가 가장 먼저 비판해야 할 대상은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파스칼이 한 말이다.
“나는 이 편지를 더 짧게 쓸 시간이 없었기에 길게 썼다.”
霞田 拜拜
< 저작권자 ⓒ 한반도프레스(KPP).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정영철 기자 ( ) 다른글 보기 angelpoint@hanmail.net# 태그 통합검색
뉴스 댓글
비회원 접속중